가상 사례다. 개인 사이에 쌀의 종류와 수량만 적어 매매했고 등급은 쓰지 않았다. 판매자는 등급 약정이 없으니 가장 낮은 품질의 쌀로 넘겨도 된다고 말한다. 구매자는 최고 등급을 원한다. 문서에 등급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쪽 요구가 옳은지 정해지지는 않는다.
민법 제375조 제1항은 채권의 목적을 종류로만 지정한 경우 거래의 성질이나 당사자 의사로 품질을 정할 수 없다면 중등품질의 물건으로 이행하도록 한다. 약정이 없다는 설명에서 곧바로 최저급이나 최고급을 고르는 규정은 아니다. 먼저 그 거래에서 품질을 확인할 다른 사정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사례에서 계약서에 등급란이 비어 있어도 견본을 보고 그 품질로 거래하기로 했거나 이전 대화에서 구체적인 상태를 정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의사가 있었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 모든 문서를 품질 미정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거래의 성질과 당사자 의사로도 정할 수 없는 경우에 중등품질 기준이 문제된다.
그다음에는 같은 종류의 여러 물건 중 어느 것이 실제 채무의 목적물이 됐는지도 구별한다. 제2항은 채무자가 이행에 필요한 행위를 마쳤거나 채권자의 동의를 얻어 이행할 물건을 지정하면 그때부터 그 물건을 채권의 목적물로 삼도록 한다. 판매자가 창고에서 혼자 포대를 골랐다는 말만으로 언제나 이 요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매매계약과 주문 내역은 종류 · 수량과 명시한 품질을, 견본 사진과 협의 회신은 당사자가 어떤 품질에 동의했는지를 보여 준다. 품질 검사 자료는 실제 넘기려는 물건이 그 기준에 맞는지 대조하는 데 쓴다. 포대의 식별표시와 지정 동의, 인도 준비 및 전달 자료는 제2항의 특정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당사자는 물건을 받은 뒤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만 반복하기보다 적용할 품질 기준과 실제 물건의 상태를 나누어 정리해야 한다. 단순히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중등품질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 무엇을 주기로 했는지와 실제 물건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