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용 가상 사례다. 갑이 고의로 을의 장비를 파손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그런데 갑은 을에게 받을 대여금이 있다며 그 돈과 맞계산하고 차액만 주겠다고 한다. 서로 받을 돈이 있다는 설명만으로 정리가 끝나지는 않는다. 고의의 불법행위로 생긴 배상채무에는 별도의 상계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민법 제496조는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일 때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고 정한다. 위 사례에서 제한되는 사람은 고의로 장비를 파손하여 배상채무를 부담하는 갑이다. 갑이 보유한 대여금채권의 존재와, 그 채권을 이용해 을의 손해배상청구에 상계로 맞설 수 있는지는 다른 판단이다.
따라서 쌍방이 같은 금액을 주장한다는 사정만으로 손해배상액에서 대여금을 빼기는 어렵다. 제496조가 상계를 제한한다는 사실을 반대채권 자체도 당연히 사라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적용의 출발점은 손해가 났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인지다. 계약 대금의 지급채무인지, 과실로 생긴 손해인지, 고의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인지 원인별로 정리해야 한다. 당사자가 손해배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유만으로 제496조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을이 준비할 자료는 장비의 파손 전후 사진, 파손 경위가 담긴 대화나 영상, 수리 내역과 손해 산정 자료다. 각각 손상과 발생 경위, 고의에 관한 주장 및 손해 범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갑의 대여금 자료와 상계 통지는 어떤 채권을 누구의 배상채무와 맞계산하려는지 확인하는 데 쓴다.
이미 판결이나 합의가 있다면 채무의 원인과 인정된 금액을 그 문서와 대조해야 한다. 상계를 주장하는 사람과 피해채권자를 뒤바꾸어 제496조를 설명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을의 대응은 갑의 채권이 있다는 말만으로 공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상채무의 원인과 상계 제한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