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주의 대리인이라며 가족이 통장과 신고인감을 가지고 와 예금 해지와 지급을 청구했다. 은행은 예금주가 사망한 사실을 몰랐다. 실제 수령권한이 없었다는 이유로 예금 지급의 효력이 다퉈지자 은행이 어떤 확인을 했는지가 문제가 됐다.
대법원 2004. 4. 23. 선고 2004다5389 판결은 정당한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외관을 가진 사람에게 과실 없이 지급했는지를 살폈다. 스스로 채권자라고 하는 사람뿐 아니라 채권자의 대리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도 채권의 준점유자에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은 청구서에 찍힌 인영과 신고인감, 비밀번호를 대조했다. 주민등록증으로 예금주와 청구인의 호주 이름이 같은 점도 추가로 확인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사정에서 은행이 수령권한을 믿은 데 과실이 없었다고 보아 지급의 효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원심을 파기했다. 환송 뒤 예금주 측이 패소해 확정됐다.
민법 제470조는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가 변제자의 선의와 무과실이 있을 때 효력이 있다고 정한다. 가족이라는 신분 자체가 예금을 대신 받을 권한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니다. 권한이 있는 듯한 외관과 지급한 은행의 구체적인 확인 경과를 함께 판단했다.
특히 이 사건의 실제 지급은 호주제가 있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당시 호주 이름을 확인한 방법을 현재 금융거래의 표준 절차처럼 옮겨 쓸 수는 없다. 통장과 인감만 있으면 언제나 면책된다거나, 가족이 대신 지급받았으면 언제나 은행이 배상한다는 설명도 이 판결의 범위를 벗어난다.
대리 지급으로 분쟁이 생겼다면 누가 어떤 명의로 청구했는지, 어떤 통장과 인감을 제시했는지, 은행이 실제 확인한 자료를 살펴야 한다. 예금주가 직접 위임했는지와 별개로 은행의 지급이 유효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 사건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급 당시의 외관과 주의의무 이행을 구체적으로 살핀 사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