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후견제도에 관한 상담이 끝나고 의뢰인이 돌아간 자리에, 노란 메모지 하나가 남았다.
“장남에게는 절대 맡기지 말 것.” 꾹꾹 눌러 쓴 글씨 옆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일흔셋의 여성이 내 사무실에 앉아서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한 것은, 치매가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치매가 올 것 같다는 것이었다. 친언니가 먼저 그렇게 되었고, 어머니도 그랬고, 이제 자신도 가끔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잊는다고 했다.
그 여성이 원한 것은 간단했다.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리기 전에,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을 자기가 정해놓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바람이다. 임의후견제도는 바로 이 바람을 위한 법적 장치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임의후견제도를 미루는 이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이 180만 명이라고 한다.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는 결정, 그러니까 죽음에 관한 결정은 기꺼이 내린다. 그런데 치매가 온 뒤 누가 내 통장을 관리하고, 어떤 요양원에 들어가고,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미리 정해두는 사람은, 2023년 기준 전국에서 42명이었다.
죽음은 결정하면서 삶은 결정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기이하다.
나는 이것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실하게 온다. 그래서 오히려 준비하기 쉽다. 반면 치매는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불행에 대해 사람은 준비를 미룬다. 아직은 괜찮으니까. 아직은 냄비를 끌 수 있으니까. 아직은 장남에게 직접 “너에게는 안 맡긴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 ‘아직’이 사라지는 순간은, 본인이 가장 마지막으로 안다.

가족이라는 이름
내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장면은, 가족회의다.
치매 진단을 받은 부모를 두고 자녀들이 모인다. 대부분은 선의로 시작한다. 요양원이 좋겠다, 간병인이 낫다, 집에서 돌보자. 그런데 선의가 갈라지는 순간이 온다. 아파트를 팔아야 하는지, 예금을 누가 관리하는지, 누가 주된 돌봄을 맡는지. 선의는 이해관계 앞에서 조용히 침식된다.
법정후견 심판이 청구되고, 법원이 후견인을 정하고, 후견감독인이 붙는다. 제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는 이미 없다. 장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뜻도, 요양원보다 집이 좋다는 뜻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 당사자가 말할 수 있었을 때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사랑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묻지 않는 것들이 있다. “엄마, 나중에 치매 오면 어떻게 해드릴까요”라는 질문은, 한국의 가족 문화에서 차마 꺼내기 어렵다. 불효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후견은 사후적으로 시작된다. 이미 판단능력을 잃은 뒤에야 법원의 힘을 빌린다. 지금의 후견 제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서류 봉투 속의 선언
임의후견계약을 체결하는 날, 공증사무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법적 절차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의식이다.
공증인 앞에 앉아서, 자신이 지금 판단능력이 있음을 확인받고, 자신의 미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를 스스로 선언한다. 대리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 결정만큼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와서, 직접 말하고, 직접 서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증인은 “당신은 지금 이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습니까”를 확인한다.
이 절차의 무게를 생각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마주 보고,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는 날을 인정하고, 그날을 위한 결정을 오늘 내리는 것이다.
그 노란 메모지를 쓴 일흔셋의 여성은, 자기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않는지를 아직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장남이 왜 안 되는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사정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의 가족사가 압축된 한 줄이었을 것이다. 그 판단이 가능한 지금이, 그 판단을 법적 문서에 담아두어야 하는 시점이다.
치매가 온 뒤에는, 장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뜻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다. 그때 가서는 법원이 정한 사람이 그녀의 재산을 관리하고, 법원이 정한 기준으로 그녀의 삶이 결정된다. 장남이 후견인이 될 수도 있다.

임의후견제도와 나라는 사람의 연속성
이 제도를 오래 들여다보면서 나는 자꾸 하나의 질문에 돌아온다. 치매에 걸린 뒤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법률적으로는 동일인이다. 주민등록번호가 같고, 재산의 소유자가 같고, 가족관계가 같다. 그러나 판단능력을 잃은 뒤의 그 사람이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던 사람이 아이스크림 앞에서 무표정해질 수 있다. 손녀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 손녀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의후견계약이란,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대신하여 내리는 결정이다. 미래의 나는 이 결정에 동의한 적이 없다. 동의할 능력이 없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구속하는 셈이다.
이것은 자기결정권의 행사인가, 아니면 자기결정권의 선취인가.
나는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자기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내가 미리 울타리를 쳐 두는 것. 그 울타리 안에서 미래의 내가 비록 나를 잊더라도, 나다운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은 구속이 아니라 배려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읽히지 않을 수도 있는 편지다.
돌아오지 않은 메모지
그 여성은 상담 뒤 공증 일정을 잡겠다고 했다. 나는 필요한 서류 목록을 안내하고, 계약서 초안을 잡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보름이 지나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나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장남이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셨다고 했다.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노란 메모지에 적힌 바람은, 결국 법적 문서가 되지 못했다. 한 달이 모자랐다. 한 달이 아니라, 어쩌면 일주일이 모자랐을 수도 있다.
이 제도의 절차와 요건, 비용, 필요한 서류 등은 법률정보: 임의후견계약, 어떻게 준비하나요?에서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준비할 수 있을 때 읽어두시길 권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절차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직 괜찮다’는 생각이 언제까지 유효한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준비는 항상, 필요하기 전에 하는 것이다. 필요해진 뒤에는, 더 이상 준비라고 부르지 않는다.
법무사 김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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