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한 통이 도착했다
3월 1일, 대한법무사협회 뉴스레터 제122호가 도착했다. 권두언의 제목은 이랬다. “AI 기술보다 공신력 등 제도적 내실이 우선이다.”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공신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우리나라 등기 시스템이 형식적 심사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건, 현업 법무사라면 누구나 아는 오래된 문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지금, AI와 맞세우는 논거로 등장하는가.마치 “우리 집 수도관도 안 고쳤는데, 무슨 스마트홈이냐”는 말처럼 들린다. 수도관을 고치는 것과 스마트홈을 준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둘 다 해야 한다.협회의 논리를 들여다보자
첫째, AI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AI의 불완전함이 현행 시스템의 정당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AI가 등기 심사를 완벽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금의 형식적 심사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둘째, 기술은 제도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2026년 1월 15일, 토큰증권법(「주식·사채 등의 전자등록에 관한 법률」·「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부동산, 미술품, 지식재산권이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 · 이전 · 소각되는 시대가 법적으로 열린 것이다. 협회가 “제도적 내실이 먼저”라고 말하는 사이에, 제도는 이미 바뀌었다.토큰증권법(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 — 공포 후 1년 시행 예정2026년 1월 1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토큰증권법(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은 부동산 · 미술품 · 지식재산권 등 실물 자산을 블록체인 기반 토큰으로 발행 · 유통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공포 후 1년 시행 예정으로, 2027년 상반기 본격 시행이 전망된다. 이 법은 법무사 업무 영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수성 전략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기존 업무 영역을 지키겠다는 전략은 그 영역 자체가 유지될 때만 유효하다. 종이 등기부등본이 블록체인 원장으로 대체되기 시작하면, 지키려는 성 자체가 사라진다. 성벽을 높이 쌓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넷째, 이 방패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협회가 “공신력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때, 그 명분이 보호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인가, 아니면 기존 업무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자리인가. 현업 법무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를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도구다.그래도 협회의 우려를 전부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솔직하게 말하겠다. 기술이 빠르게 밀려올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적응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법무사,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 작은 사무소에서 혼자 일하는 사람들.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협회의 본능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보호의 방법이다.변화를 막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지연일 뿐이다. 진짜 보호는 회원들이 변화에 올라탈 수 있도록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스웨덴은 2016년부터 블록체인 기반 부동산 등기를 시범 운영했다. 두바이는 2025년 전체 부동산 거래를 블록체인으로 전환하는 파일럿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도 토큰증권법(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 통과와 함께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들이 본격적인 인허가 절차에 진입했다.숫자로 보는 토큰화 시장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30년까지 한국 STO 시장 규모를 367조 원으로 전망했다. 딜로이트(Deloitte)는 2035년까지 전 세계 부동산 토큰화 시장이 4조 달러(약 5,6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이 약 680조 원이니, 그 여덟 배가 넘는 규모다.
20세기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상상했던 것이 있다. 지식과 정보가 중앙에 집중되지 않고,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 분산되어 자생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체계. 그것이 기술로 현실이 되고 있다.블록체인은 등기 원장을 중앙 기관 없이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스마트 컨트랙트는 계약의 이행을 코드로 자동화한다. 이 흐름 앞에서 “우리 제도의 내실이 먼저”라고 말하는 것은, 물이 이미 발목까지 찬 방에서 벽지 색을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그런데 기술은 만능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법무사의 자리가 있다. 스마트 컨트랙트는 “if-then”의 언어로 작동하지만, 현실의 권리관계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계약 당사자의 의사능력, 등기 원인의 적법성, 선순위 권리와의 충돌, 조건부 이행의 해석 — 이런 것들은 코드 한 줄로 처리되지 않는다. 자연어와 코드 사이의 간극, 바로 그 틈에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문제는 그 전문가가 반드시 지금의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가, 이다.변호사와 법무사 — 누가 이 변화에 더 준비되어 있는가
사회적 인식에서 법무사는 변호사보다 아래에 놓여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토큰증권이 발행되고, 부동산이 디지털 원장에 올라가고, AI가 계약서를 분석하는 시대에 — 분쟁이 터진 뒤에 개입하는 전문가와, 권리가 만들어지고 이전되는 그 과정 자체를 다루는 전문가 중, 더 먼저 호출되는 쪽은 어디인가.변호사의 교육과 커리어 경로는 분쟁 해결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물론 자문이나 기업법무로 영역을 넓힌 변호사도 많다. 그러나 등기, 공탁, 법인 설립, 가족관계등록, 비송사건 — 이것들은 로스쿨 커리큘럼의 중심이 아니며, 대부분의 변호사가 실무로 반복 체득하는 영역도 아니다.법무사의 구조적 강점경험 있는 법무사는 등기가 어떻게 공시되고, 법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권리가 어떻게 이전되는지를 실무로 체득한 사람들이다. 토큰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디지털 자산이 발행되고 이전되는 그 순간, 권리의 적법성을 검증하고 제도적 안전장치를 설계할 수 있는 전문가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사실이, 이 시대에 불리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이미 문이 열리고 있다
2025년 리걸테크 기업 엘박스(LBOX)가 부산지방법무사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LBOX는 AI 기반 판례 검색, 법률 문서 초안 작성, 대화형 법률 리서치 기능을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이 협약의 핵심은 법무사 실무에 AI를 통합하는 첫 공식적 시도라는 점이다.아직은 판례 검색과 문서 보조 수준이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AI가 법무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법무사가 AI를 도구로 쓰는 구조다.그 너머에는 더 큰 영역이 열리고 있다. AI가 등기 신청서를 자동 생성하면 누군가는 그 결과물의 법적 정합성을 검증해야 한다. 부동산이 토큰화되면 누군가는 기초 자산의 권리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스마트 컨트랙트가 작동하면 누군가는 코드와 법률 사이의 간극을 감사해야 한다.“누군가”가 법무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현업의 감각나는 현업에서 등기 업무를 하면서, AI가 생성한 서류를 처음 받아봤을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형식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런데 매매 목적물의 지분 표시에서 미세한 오류가 있었다. 사람이 보지 않았다면 그대로 접수됐을 것이다. 기술이 99%를 해결해도, 나머지 1%에서 전문가의 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블록체인 리터러시부터 시작해야 한다. 토큰이 어떻게 발행되고, 스마트 컨트랙트가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 최소한의 개념은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개발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등기법을 아는 법무사가 블록체인의 기본 논리를 이해하면, 그 교차점에서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전문성이 생긴다.AI를 실무에 통합하는 것도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LBOX 같은 플랫폼을 단순히 “써보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업무 프로세스 안에 어떻게 녹일 수 있는지를 실험해야 한다. 판례 검색을 AI에 맡기고, 절약된 시간으로 고객 상담의 질을 높이는 것. 문서 초안을 AI가 잡고, 법무사는 검토와 판단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실무 통합의 출발점이다.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야의 전환이다. “나는 등기 업무를 한다”에서 “나는 권리의 이전과 검증을 다룬다”로. 하는 일의 본질을 다시 정의하면, 수단이 종이에서 블록체인으로 바뀌어도 전문가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확장된다.글을 마치며
다음 달이면 또 뉴스레터가 올 것이다. 거기에 “디지털 시대, 법무사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제목이 실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마 낮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성벽 안에서 바깥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고립이다. 무기를 바꿀 시간이다. 방패를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방패 대신 들 수 있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협회에 묻고 싶다. 10년 뒤, “그때 준비했더라면”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고 말할 것인가. 그 선택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자주 묻는 질문
RWA 토큰화가 법무사 업무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이 블록체인 토큰으로 발행되면, 기초 자산의 권리관계 확인, 토큰 발행의 법적 정합성 검증, 스마트 컨트랙트와 실제 계약 사이의 간극 감사 등 새로운 법률 서비스 수요가 생깁니다. 이것은 등기와 권리관계를 다루는 법무사의 기존 전문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블록체인 리터러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개발자 수준의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토큰이 어떻게 발행 · 이전 · 소각되는지, 스마트 컨트랙트의 기본 구조가 무엇인지, 블록체인 원장과 현행 등기부등본의 차이는 무엇인지 — 이 정도의 개념적 이해가 출발점입니다.
LBOX와 부산법무사회 협약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법무사 업계에서 AI를 실무에 통합하려는 첫 공식적 시도입니다. LBOX의 AI 판례 검색, 문서 초안 작성 기능을 법무사 실무에 접목하는 것이 핵심이며, AI가 법무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법무사가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법무사가 변호사보다 이 변화에 유리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변호사의 교육과 커리어 경로는 분쟁 해결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 법무사는 등기, 공탁, 법인 설립, 가족관계등록 등 권리의 생성 · 이전 · 변경 과정 전체를 실무로 다뤄왔습니다. 토큰화 시대에는 분쟁 이후가 아니라 권리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의 전문가가 먼저 필요합니다.
법무사 김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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